레오나르도 다빈치 -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화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으로 들어가 해부학, 원근법, 드로잉을 비롯한 미술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1482년 밀라노로 간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 공작의 화가이자 군사기술자, 건축가로 일하며 18년을 머물렀고, 이곳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수력학, 해부학, 식물학, 광학 등 온갖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습니다.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 입니다.
1499년에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군대가 침입하자 밀리노를 떠나 만토나와 베네치아를 거치고, 1503년 피렌체로 돌아와 1506년까지 머무는데 이 시기에 윤곽선을 희미하게 처리해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해 《모나리자》를 그립니다. 또한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와의 경쟁으로 잘 알려진 베키오궁의 벽화 《앙기아리 전투》에 착수했지만 완성을 하지 못합니다. 이 그림은 현재 밑그림만 전해지고 있고, 후에 라파엘로를 비롯한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512년 로마로 갔던 레오나르도는 1516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이주해 말년을 보냈으며, 1519년 앙부아즈의 클로 뤼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 과학, 해부학, 천문학 등에 정통했으며, 직접 관찰하고 실험한 결과를 글과 스케치로 남겼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
모나리자(15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소장)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입니다. 《모나리자》는 언제, 누구를 모델로 하려 그려진 것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레오나르도가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고, 기록들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서술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인 바자리의 「미술가 열전」에 근거하여 이 여인이 누구인지 추정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인 조콘도의 부인 리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이 작품은 '리자 부인'이라는 뜻으로 《모나리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초상화가 왜 주문자에게 인도되지 않고, 작가의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가 후일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꼐끼로 남아있습니다.
작품속 여인이 자아내는 신비로움은 여인이 살짝 짓고 있는 그 미소에서 더욱 고조됩니다. 여인의 미소를 '스푸마토'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묘사했습니다. '스푸마토'는 이탈리아어로 흐릿한 또는 자욱한을 뜻하는 말로 인물의 윤곽선을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해 경계를 없애는 방법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여인의 입 가장자리와 눈꼬리를 스푸마토 기법으로 묘사하여 여인의 미소를 모호하지만 부드럽게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화면 밖을 주시하고 있는 여인의 상체는 화면에서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몸은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어서 관람자가 보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달라보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느낌은 배경에 묘사된 풍경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데, 이는 인물 좌우의 풍경 속 지평선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강이 흘러가는 물길을 표현하면서 마치 인물 오른쪽의 지평선이 더 높은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도록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왼편에서 인물을 관찰할 때와 오른편에서 인물을 관찰할 때의 느낌이 다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모나리자》는 작품속 인물에만 집중하게 되어서 배경은 잘보지 않게 되었는데, 설명을 보고 배경을 자세히 보니 모나리자의 양 옆 배경이 다르네요! 배경과 함께 보니 탁 트인 발코니에 의자를 놓고서 그림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나네요!
최후의 만찬(1495~1497년,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소장)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열두 제자의 반응을 그린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성당에 그려져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예수가 위의 말씀을 한 후 열두 제자들의 반응을 각자의 기질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다양한 얼굴 생김새와 표정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두개골 형태에 따라 관상이 달라지며 이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해부학 실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두개골을 면밀히 연구한 후 그 형태에 따라 제자들의 생김새를 결정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거기에 맞는 반응을 얼굴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다른 벽화들에 비해 상태가 좋지 않는데, 이는 젖은 벽에 안료를 칠하는 프레스코 기법을 쓰지 않고, 마른 벽에 직접 템페라 물감과 유화물감으로 그렸기 때문에 16세기 초반부터 그림의 상태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당시 그가 프레스코화로 그리지 않은 이유는 하루치 분량만큼만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 기법이 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인 수학적 원근법의 결정판이라고도 하는데요. 원근법의 소실점은 바로 예수의 머리입니다.
비트루비안 맨(1487년경,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저서를 접하고 레오나르도가 이를 드로잉으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인체는 비례의 모범이다. 사람이 팔과 다리를 뻗으면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한 비트루비우스의 글을 따라 레오나르도는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선 남성의 인체를 원과 정사각형의 선으로 둘러 그 안에 인체가 완벽히 합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미술백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네이버 미술백과 '모나리자(Mona Lisa)'
네이버 미술백과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네이버 미술백과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