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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by 윤새싹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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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

남자의 초상 또는 (붉은) 터번을 한 남자의 초상© The National Gallery, London - GNC media, Seoul

15세기 플랑드르 미술의 대가인 얀 반 에이크의 출생이나 교육에 관해서는 자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현 네덜란드 동남부 마스트리히트 부근 마세이크에서 태어났고 형제인 후베르트와 람베르트도 화가였다고 합니다.

 

얀 반 에이크는 1422년 헤이그의 궁정에서 일했으며, 1422년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립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1428년에는 포르투갈로 가는 외교 사절단에 합류해 선량공 필립의 아내가 될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의 조상화를 그렸습니다. 1431년에는 브뤼헤로 이주해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바사리는 언급 때문에 유화의 발명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유화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기법이었고, 얀 반에이크는 유화 기법을 확립하고 매우 잘 활용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풍부한 색채와 살아있는 질감, 극도로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 등은 당시 이탈리아 미술과 확연히 구분되는 플랑드르 미술의 양식을 탄생시켰습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지오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의 초상(아르놀피니의 약혼)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 GNC media, Seoul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오크 화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입니다. 

 

실내에 있는 조반니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이며, 배경의 방은 프랑드르의 브루제에 위치한 그들의 저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여러 가지 상징이 들어간 가장 독창적이고 복합적인 그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434년과 반 에이크라는 날짜와 서명이 표시되어 있으며, 템페라 대신 유화 무람을 쓴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그림입니다.

 

1842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을 구입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모델은 아르놀피니 부부..?

오랫동안 이 그림은 플랑드르 침실을 배경으로 한 조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 조반나 체마니의 초상화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997년, 그들이 그림이 그려진지 13년 후이자 얀 반 에이크가 죽은지 6년 후인 1447년에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그림의 모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씁니다.

오늘 날에 이 그림은 조반니 디 아리고의 사촌인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는 루카 출신의 이탈리아 상인으로, 적어도 1419년부터 브루제에 거주하였으며 이 그림 이후 얀 반 에이크가 베를린에서 그린 초상화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가 화가의 친구였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여인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아내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2003년에는 1433년 2월에 사망한 첫 번째 아내 코스탄자 트렌타라는 가설도 제기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을 보면, 이 그림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흡사해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유의해 볼 부분은 두 남녀의 맞잡은 두 손입니다. 이 그림이 이 두 남녀가 결혼하는 장면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오른손을 잡았어야 하는데, 남자는 왼손으로 여성의 오른손을 잡고 있습니다. 이로 보았을때 이것은 완전하지 못한 결혼이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남녀의 신분이 큰 차이가 있을때 이런식으로 '왼손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첩을 들일때도 이와 같이 '왼손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서 <아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등장한 사람은 조반니 아르놀피니가 맞으며 이 결혼은 완전한 결혼이 아니여서 아르놀피니가 그의 아내와 정식으로 결혼한 시기가 이 때가 아니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가설입니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에 묘사된 상징들

그림 속 시기와 장소

창문 밖으로는 체리나무가 보입니다. 체리나무에는 열매가 맺혀있는데요. 이로 추측해 볼 수 있는건 이 부부가 여름철 2층 방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장소는 보통 침실로 추측하고 있으나 침실이 아니라 응접실이라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응접실에 침대를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앉는 용도 외에 산모와 신생아 손님을 맞이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창문은 여섯 개의 내부 목재 덧문이 달려 있으며, 열려 있는 창문의 최상단 부분에만 유리가 끼워져 있습니다. 이 유리는 파랑과 빨강, 초록으로 칠해진 밝은 과녁 문양의 스테인드 글라스입니다.

 

 

두 남녀의 의상과 장신구

체리 열매가 맺는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두 남녀는 겉옷은 타바드와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모피가 의상의 가장자리에 장식과 안감 전체로 사용되었습니다. 

 

남자가 쓰고 있는 모자는 짚으로 엮은 것을 검게 염색한 것으로, 당시에 사람들이 여름마다 종종 쓰는 모자였다고 합니다.

 

남자의 타바다는 안료의 색이 바랜 현재에 비해 한때 보라빛을 많이 띄었으며, 역시나 매우 비쌌던 비단 벨벗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상 안에는 무늬가 새겨진 돈수 재질의 더블릿으로 보입니다.

남자는 상인 신분에 맞는 의상을 입어야 한다는 사회적 제약이 따랐기 때문에 장식이 많은 의상은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드레스는 소매자락과 길게 끌리는 옷자락에 세밀한 손질이 필요한 대깅이 되어있고, 안쪽 드레스에도 흰 모피가 덧대어져 있습니다. 또한 여성은 황금 목걸이와 양 팔에 팔찌를 끼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비싼 장신구였습니다. 

 

 

방 내부에 있는 부의 상징들

- 황동 샹들리에

방 내부 천장에 달려있는 황동 샹들리에는 크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당시 기준을 보았을때 매우 비싼 가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볼록 거울

인물의 뒤 쪽 벽에 붙어있는 볼록거울은 그리스도의 고난 장면이 그려진 목재 틀이 유리 뒷부분에 붙어있습니다.

 거울은 당시에 실제 만들어질 수 있던 거울보다 크게 그려졌습니다. 

 

거울 속에 비치는 벽난로나 실내에 놓인 물건들에는 특별한 상징이 없습니다.

 

거울에는 부부를 마주보고 무 안쪽에 서있는 두남자가 보이는데, 앞에 파란 옷을 입은 남자는 화가 본인인 얀 반 에이크로 보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진 않습니다. 

 

 

- 그 외

천장에 걸린 철제 막대로 고정되어 있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침대 커튼, 의자와 뒤쪽 벽에 붙은 긴 의자에 새겨진 조각들, 침대 밑에 깔린 바닥의 작은 오리엔탈 카펫도 부의 상징입니다.

값비싼 카펫을 소유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탁자에 올려놓았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부의 앞에 서 있는 강아지는 오늘날 브뤼셀 그리펀으로 알려진 품종의 초기 형태라고 합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위키백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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