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파울 루벤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남유럽과 모국 프랑르로 대표되는 북유럽 미술 전통을 종합하여, 빛나는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독자적인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17세기 유럽의 대표 화가입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상류 부르주아의 가정 출신입니다.
1577년 당시 개신교 신앙 박해를 피해 이주해했었던 쾰른 근처 지겐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루벤스는 먼 친척이었던 풍경화가 토비아스 베르하크트, 매너리즘 양식의 인물화를 그리던 아담 반 노르트, 당시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이탈리아 유학파 화가 오토 반 벤에게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루벤스가 14살때였습니다.
그가 마스터로 독립하고 2년이 지난 1600년에 8년간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만토바의 공작 빈센초 곤자가의 궁정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고대에서 당대까지 이르는 이탈리아의 미술을 모사하며 익힙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본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의 그림, 바티칸의 라파엘로와 미켈렌젤로의 작품, 로마에서 접한 고대 그리스 조각, 스페인에서 본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 동시대 화가인 코레지오와 카라바조 등의 작품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타고난 재능과 공부하고 연구하여 이탈리아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다음해인 1609년에 프랑드르를 다스리던 이사벨라와 그녀의 남편 알베르토 대공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십자가를 세움 (1610, 앤트워프 성모마리아 대성당)
17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교회와 미술품들이 많이 파손되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루벤스는 기독교 주제 그림을 많이 그렸데, 그 중 벨기에 최대의 교회인 안트베르펜 성당에 있는 두 점의 제단화인 <십자가 세움>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가 대표적입니다.
<십자가를 세움>은 성 발부르가 교회를 위해 사인 반 데어 기스트의 후원으로 제작이 되었는데,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가져갔고, 그의 몰락과 벨기에의 독립 이후 안트베르펜 대성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세움>은 제단에 세우는 삼면화입니다. 경첩으로 좌우 그림이 연결되어 있고, 좌우측면 패널의 뒷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이 패널을 닫아 놓으면 다른 그림이 보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운데는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가 세워지는 모습이 담겨 있고, 왼쪽에는 마리아와 요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끌려오는 두명의 죄수와 명령을 내리는 로마군 장교가 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북유렵의 중세부터 내려오던 제단화의 형식이며 보통 때는 닫아놓고 일요일이나 특별한 축일에 열어놓곤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세움>의 예수는 아직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중세 이래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숨을 거툰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인데요. 이런 예수의 모습과 십자가를 들어올리는 장면 자체가 중세나 르네상스에서는 볼 수 없던 주제였는데, 이는 반종교개혁의 정신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반종교개혁 가톨릭 미술은 고통받는 구원자를 묘사할 때도 보다 영웅적이고 신과 같은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전쟁의 공포 (1638, 런던 내셔널 갤러리)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는 평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루벤스는 알레고리적인 의인화라는 기법을 자신의 모국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도 사용했습니다.
1638년에 토스카나의 대공 페르디난트 2세가 주문하여 제작한 <전쟁의 공포>에는 피묻은 칼을 들고 전쟁터로 떠나는 전쟁의 신 마르스가 화면 중앙에 보입니다. 평상시에는 닫혀 있는 야누스 신전 문이 열려있습니다. 문학과 교양을 나타내는 책을 짓밟고 있는 마르스는 애인 비너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염병과 기근, 노여움이 이끄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 아래 조화의 상징인 류트는 부러지고, 풍요와 돌봄을 상징하는 아이 안은 어머니도 위협을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 누워있는 남자는 건축가의 도구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미술과 건축물도 파괴도 만다는 뜻입니다. 화면 왼쪽의 검은 옷을 입고 슬퍼하는 여성은 불행한 유럽의 의인화입니다.
평화의 알레고리 (1629~1630, 런던 내셔널 갤러리)
<평화의 알레고리>는 <전쟁의 공포>와는 달리 마르스가 물러간 자리에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아이들과 표범이 함께 뛰어 노는 평화가 찾아온다는 루벤스의 이상향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복입은 남자 (1606~1608, 폴 게티 미술관)
<한복 입은 남자>는 루벤스의 인물 드로잉 중 매우 세심한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1983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드로잉으로는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에 낙찰되어 큰 주목을 받았고,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작품 속 인물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는지, 루벤스와 어떻 경유로 만나게 되었는지 등 의문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작품을 살펴보면 남자는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관모를 쓰고 있습니다. 얼굴 생김새는 몽골리안 계통에 가까우며 눈에 쌍커풀이 있고 수염은 짧게 깍았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인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학계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이탈리아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라는 여행기에 기초해 볼 때 작품의 남자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왔다가 카를레티를 따라 로마까지 가게 된 인물로 루벤스는 로마에 머물던 1606년부터 1608년 사이에 그곳에 있었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직접 만나 초상화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한편 2016년에 네덜란드의 테이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작품 속의 남자가 명나라 상인 이퐁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로 루벤스가 조선인을 만나 그린 그림이 아니라 17세기 니콜라스 드 프리서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던 중국인 상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 근거로는 드 프리서문집 속의 초상화와 루벤스 작품 사이의 큰 시각적 유사성을 들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미국 로스랜젤레스의 폴 게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복 입은 남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왔던 이 그림은 폴 게티 미술관으로 옮겨지면서 <조선 남자>라는 제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 루벤스'
네이버 지식백과 '한복 입은 남자(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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