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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동안 잿더미에 파묻혀 있던 폼페이

by 윤새싹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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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 폼페이

폼페이는 지금은 내륙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폼페이는 처음에는 오스키인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다가 BC470~BC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고,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후 동맹시전쟁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하여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 되어갔습니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2월에도 큰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습니다.

 

 

 

1700년동안 잿더미에 파묻혀 있던 폼페이

79년 8월 24일 정오 무렵, 베수비우스 화산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화산 쇄설물이 폼페이에 비 오듯 쏟아졌고, 다음 날에는 타는 듯한 뜨거운 가스의 구름이 휩쓸었습니다. 때문에 건물들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압사하거나 질식사했으며, 도시는 재와 화산암 더미 밑에 파묻혀 버립니다.

 

1738년, 헤르쿨라네움 근처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폼페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부르봉 왕가의 나폴리 왕인 카를로 3세는 스위스 출생의 군사 기술자 카를 베버의 책임하에 폼페이를 전면적으로 발굴할 것을 명했습니다. 

 

1748년 이래로 발굴 작업에 돌입한 폼페이는 몇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재로 된 장막 아래,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로 존재해 있었습니다. 발굴된 폼페이의 모습을 본 전세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죠. 약 2만명의 주민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도시가 시간의 흐름을 넘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인데요. 

 

훌륭한 포럼과 원형 극장 등 커다란 공공건물들이 서 있었고,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호화로운 저택과 온갖 종류의 집들고 있었습니다. 내부에는 폭발을 피해 집으로 숨은 사람들의 유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어떤 이들의 달아나던 모습이 그대로 묻혀있었습니다. 심지어 빵집의 화덕에는 여전히 빵이 들어있는 채였습니다. 폼페이의 건물들과 그 내부는 고대 세계의 일상적인 나날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1900년대가 되어서는 훨씬 나은 발굴방법으로 발굴해낼 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아직까지도 발굴해야할 부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폼페이는 1997년 헤르쿨라네움과 토레 아눈치아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배과 '폼페이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폼페이(Pompeii)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리처드 카벤디쉬, 코이치로 마츠무라, 김희진)'

네이버 지식백과 '폼페이 발굴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8. 20., 마이클 우드, 피터 퍼타도, 박누리,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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