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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시민들의 공공오락실이었던 콜로세움

by 윤새싹 2021.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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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건축

콜로세움

5만명 가량의 관객수를 수용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80년경이 되어서야 건축이 끝나 100일간의 축제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립니다. 

 

온천 침전물 대리석으로 건설된 이 원형 건물은 최초에 '플라비아누스 원형 극장'으로 불렸습니다. 

콜로세움은 비공식 이름이었는데, 이 콜로세움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이 있고,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호화로운 구경거리가 펼쳐지던 콜로세움

콜로세움의 내부모습

콜로세움은 글라디아토르의 시합과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오락실이었던 거죠.

 

콜로세움에서는 해상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는데,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죠. 

 

당시의 검투사들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대접을 받았습니다.

 

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할지, 용맹함을 보여주었으니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 그 자리에 황제가 있다면 황제의 결정을 살폈습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후에 중세시대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쓰였으며, 그 후에는 저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 가문과 안니발디 가문에 의해 요새로 이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이 건물은 손상을 입어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가 돌을 약탈해 가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으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혹한 여흥을 즐기는 인간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념물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콜로세움(Colosseum)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리처드 카벤디쉬, 코이치로 마츠무라, 김희진)'

네이버 지식백과 '콜로세움(Colosseum)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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