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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다비드상, 피에타

by 윤새싹 202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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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교황 율리오 2세 무덤의 죽어가는 노예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에게 입문하였고,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해부에도 전념합니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바쿠스》를 제작, 바티칸의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1499년 《피에타》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합니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상》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와 원형화 《성가족》이 있습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경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켈란 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제작에 전념합니다.

1508년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았지만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려 했으나 허용되지 ㅇ낳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ㅇ낳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출돌하는 악조건에서 1512년 마침내 완성을 합니다.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습니다. 그 후 메디치가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습니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안쪽 별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 《최후의 삼판》을 완성하였습니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을 1550년에 완성하였씁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 작품

천지창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512년, 로마 바티칸 궁전)

천지창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명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창세기 9장면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지창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4년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습니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만에 이 대작을 완성합니다.

아담의 창조

이 천장화는 성서의 순서와는 반대로 노아에 관한 3가지 이야기를 입구쪽에서부터 그렸는데, 완성까지는 4단계를 거쳤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2개의 곡면 벽화에 그린 3가지의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으로 1509년 9월 15일에 완성되었습니다. 두번째 단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과 《이브의 창조》, 4명의 나체상, 두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0년 8월에 완성합니다. 세번째 단계는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1년 1월과 8월 사이에 완성됩니다. 네번째 단계는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로 같은 해 10월부터 1512년 10월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 위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1535~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1533년 중순 당시의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 벽에 최후의 심판도를 그리라는 명을 받게됩니다. 클레멘스 7세가 이 그림을 주문한 것은 신성로마제국군에 의한 로마의 점령과 약탈 등 재난의 연속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데, 1534년 교황의 사망으로 이 작업은 일단 중지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 3세가 다시 이 작업을 의뢰함으로써 1535년 4월 16일 발판의 조립이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1541년 가을, 벽면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을 한 총 391명의 인물상이 드러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그림은 크게 천상계, 튜바 부는 천사들, 죽은 자들의 부활, 승천하는 자들, 지옥으로 끌려가는 무리들의 5개 부분으로 나뉩니다.

중앙의 그리스도는 수염도 나지 않은 당당한 나체의 남성상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곁에는 성모마리아가 앉아 아래 있는 인류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 주위를 성자들이 거의 원형으로 둘러싸듯 서 있고, 여기는 천사에 가까운 성자들의 세계입니다. 그 주변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거나 천상으로 올라가고, 혹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1541년 10월 31일, 낙성식이 거행된 날, 이 작품은 전 로마 시민의 경악과 찬탄의 표적이 됩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모두 나체였기 때문인데요. 1564년 1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칙령이 반포되어 생식기 부분에 덧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최근이 되어서 화학약품을 이용하여 이 벽화에 낀 그을음과 때를 씻어내는 작업이 완료되어 그 동안 가려지고 벗겨져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다비드상(David) (1501~1504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다비드상

1501년 5월 미켈란젤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온 뒤 그 해 8월부터 새로운 도시를 위한 예술 작품을 제작합니다. 이를 위해 시에서 제공한 5.5미터의 거대한 대리석은 일찍이 서투른 조각가에 의해 망가져 피렌체의 작업장에 4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죠. 미켈란젤로는 이 다루기 곤란한 대리석으로 힘이 넘치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상을 만들어 냅니다.

《다비드상》은 골리앗을 돌로 때려 쓰러뜨린 성서의 소년 영웅 다비드를 표현한 대리석 조각상입니다. 승리를 거둔 모습이라기 보다는 전투를 결심한 전사의 엄숙한 결의와 긴장감을 표현했습니다. 단호하고 바짝 경계하는 모습의 소년 다비드는 투석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균형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전체적인 신체 구도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통해 안정감을 보여줍니다. 《다비드상》의 다소 비현실적인 신체 비율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들 중 이례적인 것으로, 머리와 손, 특히 오른손의 크기는 전체 신체에 비해 유난히 거대합니다. 이는 작품의 본래 대성당의 지봉에 위치할 것을 감안한 것으로 아래에서 올라다보았을 때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고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본래 이 작품은 피렌체 대성당의 동쪽 지붕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시청 앞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져 1504년 9월 8일에 공개되었고 국가의 영광을 상징하는 작품이 됩니다. 이후 1873년에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으며 원래의 자리에는 복제본이 세워졌습니다.


피에타 (1498~1499년, 성 베드로 대성당)

피에타

《피에타》는 대표적인 르네상스 조각상입니다. 이 조각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라는 주제로 제작한 첫번째 작품이고, 동시에 유일하게 그의 서명이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로마에서 그가 받았던 첫번째 의뢰이기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98년부터 1499년까지 약 2년 동안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의 장례 채플을 위해 《피에타》를 만들었습니다.
《피에타》가 완성되고 나서 처음 있던 곳은 교황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산타 페트로닐라 교회였고, 이후 18세기에 이르로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됩니다.

《피에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진 모습입니다. 이 주제의 도상학적인 근원은 명확하지 않으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종교적인 이미지로 승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세기 초 독일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14~15세기 사이 북유럽지역에서 유행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마리아의 무릎에 있는 그리스도의 육신은 죽은 사람의 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죽은 지 2시간이 지나면 사체강직이 일어나기 때문에 죽고 나서 3시간이 지난 후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몸은 굳어진 상태여야 합니다. 마리아의 옷자락을 잡은 듯한 그리스도의 손가락, 완전히 감지 않은 듯한 눈, 웃고 있는 듯한 입가도 그가 죽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또한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려진 마리아는 애도하기보다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입니다.

학자들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두고 여러 의견을 제시 했는데,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를 재현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종교적인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젊은 여인으로 묘사한 의도는 그녀의 영원불멸한 순결함이나 아버지이자 아들인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모성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통해 그의 모성에 대한 이미지를 담아낸 것으로도 보았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Sistine Chapel Ceiling)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다비드상(David)'
네이버 지식백과 '피에터(Pi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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