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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 프란시스코 고야

by 윤새싹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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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시스코 고야 (출처 : 위키미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utorretrato_de_1815_Real_Academia_de_San_Fernando.jpg?uselang=ko)

프란시스코 고야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고야에 의해 초기 르네상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고전적인 대가로서의 화가 전통은 끝을 맺고, 근대적인 예술가 화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야는 스페인 궁정화가의 전통을 이어 세 왕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를 위해 일한 고전적 의미의 마지막 대가이자 전통적인 회화 형식을 차용하되 주제에서 거리를 두는 새로운 시선으로 그 의미를 해체한 최초의 근대적 예술가 였습니다.

고야는 그의 화가 인생동안 종교화, 초상화, 장르화, 당대의 역사와 개인적인 환상이라는 다양한 주제로 프레스코, 유화, 동판화, 석판화 등의 매체로 회화 7백여점, 판화 3백여점, 드로잉 9백여점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의 양식은 로코코에서 낭만주의까지 변화의 폭이 넓습니다.

화가 고야

고야는 활동 초기에 프란시스코와 라몬바예우 이 수비아스 형제가 1763년에 마드리드에 세운 공방에 합류합니다. 고야는 이 화가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1774년에는 이들의 여자 형제인 호세파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낙방하게 되자, 고야는 마드리드를 떠나 1770년에 로마로 갑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궁정에서 일하게 되고, 그의 섬세하고 화려한 초상화에 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청력을 잃은 고야

연작 '전장의 참화' : 페스트 병원

마흔살에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화가로 임명되고, 1789년에는 카를로스 4세의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는데, 1789년은 대변혁의 시대로 전제 군주정을 타도하고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납니다. 프랑스의 스페인에 대해 선전포고가 있었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은 1793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고야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친구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 이 페레스와 함께, 안달루시아 지방의 카디스로 여행을 가게 됩니다. 그는 카디스에 머무는 동안 심한 병을 앓았고, 이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그는 1793년 마드리드에 돌아왔는데, 이후 그의 작품은 한 층 더 어두워졌습니다.
1799년에, 고야는 풍자적인 에칭판화집 <변덕>을 완성하여 출판합니다.
또한 1810년부터 1820년경 사이에 제작되었으나, 고야 사후인 1863년에 출판된 에칭 연작인 <전쟁의 참화>는 모두 이 시대의 잔혹함과 공포를 보여줍니다.
고야의 에칭 작품들은 명암의 대비가 극적인 바로크 전통 양식에 기반하고 있지만, 독특한 구성 때문에 상당히 근대적인 느낌을 줍니다.

1808년 5월 3일

1808년 5월 3일(1814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1808년 5월 3일>은 당시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1808년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당시 스페인의 왕자였던 페르난도 7세 대신, 자신의 형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1808년 5월 2일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 다음 날인 5월 3일 밤에는 이 폭동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형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뮈라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총살로 희생된 사상자의 수는 수 천에 달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군대가 철수한 1814년, 고야는 <1808년 5월 3일> 작품을 그렸는데, 이는 마드리드 외곽의 언덕에서 있었던 프랑스 군대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어둡고 암담한 배경과 함께 총살당하는 희생자와 총을 겨누는 가해자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귀머거리의 집 (검은 그림 연작)

검은 그림 연작 : 호기심꾼들(입을 비죽이며 웃는 두 노파)

1820년부터 1823년까지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이란 뜻의 '킨타 델 소르도'라는 별칭이 붙은 전원주택을 구입해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난청과 격동적인 시대 상황으로 고통을 받던 고야는 말년에 어둡고 기괴한 작품들을 다수 제작합니다. 이중
'킨타 델 소르도'의 회벽 위에 유화로 그린 기괴하고 섬뜩한 '검은 그림' 연작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야는 회벽 위에 유화물감을 바로 사용하여 14점의 벽화를 신속하게 그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그림들을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검은 그림 연작에 고야는 어떠한 제목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알려진 제목들은 미술 비평가들이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무제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 누스) (1819년~1823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무제(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 누스)>는 '킨타 델 소르도' 1층의 방 오른쪽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캔버스에 옮겨져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야는 17세기에 루벤스가 그린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루벤스의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에서 사투르누스는 안정되게 화면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이상화 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고야의 작품에서 사투르 누스는 늙고 추한, 광기에 사로 잡힌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몸의 일부는 화면에 의해 잘려져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구도로 인해 고야의 그림을 보는 관람자는 마치 사투르 누스가 아들을 잡아 먹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루벤스는 사투르 누스보다 기겁에 질린 아이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표현했지만, 고야는 이를 변형시켜 자신의 행위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광기와 피해망상에 사로 잡힌 사투르누스에 초점을 맞추어 그려졌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 고야'
네이버 지식백과 '501 위대한 화가 - 프란시스코 고야'
네이버 미술백과 '1808년 5월 3일'
네이버 미술백과 '무제, 소위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검은 그림(pinturas negras)"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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