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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 남작 - 프시케와 에로스

by 윤새싹 2023.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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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 남작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 출처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프랑수아 파스칼 시몬 제라드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로마 대사였고, 그곳에서 만난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하여서 그는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12세에 처음 파리로 와서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드마리니 씨가 설립한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왕실 시설인 팡샹 뒤 루아에 들어갔습니다. 18개월동안 이곳에서 지내다가 오귀스탱 파주 밑에서 2년 공부 후 니콜라스 기 브레네의 스튜디오에 들어갔고, 마침내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792년 혁명 기간 동안 파리에 머무르며 자신의 숙모와 결혼을 합니다. 

1793년에는 소집 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는데, 이때 다비드의 대처로 징병을 면했고, 혁명재판소의 일원으로 선출되게 도운 것도 다비드를 통해서 였다고 합니다.

 

판사로서의 직무에 지쳐 있던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1795년이 되어서였다고 합니다.

프시케와 에로스는 1798년 살롱전에서 공개되었고, 파스칼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가 나폴레옹에 의해 공식 초상화를 그리도록 임명되고 난 후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 제작을 의뢰받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임명되었고 1814년 살롱전에는 왕의 초상화가 등장했습니다.

 

 

 

프시케와 에로스 (1797, 루브르 박물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이 작품림은 장 드 라퐁텐이 아풀레이우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1669년에 쓴 희곡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에로스의 입맞춤은 단순한 첫 입맞춤의 의미를 넘어 프시케를 되살리기 위한 입맞춤이라고 합니다.

프시케는 호기심에 비너스의 마지막 시험에서 죽음과 같은 잠에 빠졌다가, 사랑하는 프시케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던 에로스의 입맞춤에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여러가지 추측과 의문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에로스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여 그렸다고 하는데, 이에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기병대 중위인 자크 뤽 바르비에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프랑스 국립기록보관소의 총관리인이 되는 레트론이라고도 합니다. 

에로스는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여 그렸지만, 프시케는 실제 모델이 존재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다음 의문은 프시케 머리위의 나비라고 합니다.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영혼과 불안전성을 의미하는 나비라는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이 두 의미로 프시케의 영혼이 불안정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는 것 입니다.

하지만 신화속 프시케는 강하고 인내심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에대해 궁금증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1808, 베르사이유와 트리아농 궁)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아우스터리츠전투는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맹군을 격파한 싸움으로 삼제회전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아우스터리츠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슬라프코프라고 합니다. 이해 초에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제3회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에는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 야망을 저지합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대륙정책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독일로 진출, 빈을 점령합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북으로 달아나 아우스터리츠 부근에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합류해 8 만명이 넘는 동맹군을 조직하여 7만 명의 나폴레옹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 대야전으로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상기시키는 전투라고 합니다.

 

 

 

성녀테레사(1827, 마리 테레즈 저택)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1819년 샤토브리앙의 부인은 비탄에 빠진 귀족여성과 성직자를 위해서 무료 보호시설의 건립을 계획했고, 현재 파리 라스파유 거리에 있는 이 보호시설은 샤를 10세 부인의 이름을 빌려 마리 테레즈 병원이라 명명되었습니다.

당시 샤토브리앙과 친분이 있었던 레카미에 부인은 다비드의 제자인 프랑수아 제라르에게 왕녀의 수호성자인 아빌라의 테레사를 그려달라고 주문한 후 이를 병원이 예배당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넋을 빼앗긴 듯한 아름다운 성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같은 해 살롱전에 전시된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과 더불어 낭만주의를 정의하는 작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네이버 미술백과 '김달진미술연구소-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드 남작'

네이버 미술백과 '프랑스국립박물관엽합(RMN)-프시케와 에로스'

네이버 미술백과 '프랑스국립박물관엽합(RMN)-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

두산백과 '아우스터리츠전투'

네이버 미술백과 '프랑스국립박물관엽합(RMN)-성녀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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